인기 법정 드라마 <왜 오수재인가>를 세 가지 질문으로 다시 읽다. 승/패의 언어로 채워진 법정에서 인간다움은 어떻게 살아남는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각자 다르다. 누군가는 반전을, 누군가는 로맨스를, 또 다른 누군가는 살짝 과장된 현실 풍자를 즐긴다. <왜 오수재인가>는 이 셋을 모두 품는다. 그러나 더 오래 남는 것은 사건의 화려한 포장보다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이다. 오수재는 능력과 야망을 가진 변호사이지만, 그가 서 있는 법정은 종종 진실 대신 힘의 균형으로 작동한다. 이 글은 그 비틀린 저울을 중심에 두고, 상처와 복수, 사랑과 구원이라는 세 갈래의 길을 따라 작품을 다시 읽는다.
1) 권력과 진실 사이에서 무너지는 정의의 균형
오수재가 몸담은 대형 로펌은 승소 실적과 고객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 이상적으로는 진실이 승리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본과 정보력이 판결의 저울을 기울인다. 드라마는 수사 단계에서부터 재판, 언론 플레이에 이르는 전 과정이 어떻게 설계되고 매만져지는지 보여준다. 그때 시청자는 깨닫는다. ‘정의의 눈가리개’는 편견을 없애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때로는 보지 않기 위한 알리바이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흥미로운 지점은 오수재가 이 시스템의 숙련된 사용자라는 점이다. 그는 제도 내부의 문법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승리한다. 하지만 그 승리는 언제나 괄호를 필요로 한다. 이겼지만, 정말 옳았는가? 승소의 환호가 잦아들면 빈자리처럼 남는 질문. 작품은 그 빈자리를 사건의 누락된 목소리—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언어—로 채운다.
“법은 완벽한 기계가 아니다. 누가 돌리는가에 따라, 그리고 무엇을 보지 않기로 합의했는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결국 오수재가 맞서는 대상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진실을 소비하는 방식 그 자체다. 그 싸움은 외부의 적을 무너뜨리는 일만큼이나 자기 내부의 관성을 바꾸는 일과도 연결된다. 드라마는 그 균열의 순간—정확히는, 진실이 불편할 때 외면하던 습관을 멈추는 순간—을 섬세하게 비춘다.
2) 상처가 이끄는 복수, 그리고 치유의 경로
오수재의 차가움은 방어기제다. 여성 변호사로서 견뎌야 했던 편견, 조직에서의 소모, 신뢰했던 관계의 배신은 그의 세계를 유리처럼 단단하고 차갑게 만든다. 복수는 그 유리 표면을 달구는 불꽃이다. 다만 작품은 복수를 파괴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수재가 택한 복수는 ‘사건을 거꾸로 걷기’에 가깝다. 누락된 증언을 찾아내고, 지워진 기록을 복원하고, 의도적으로 흐려진 경계를 다시 그어 넣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감정의 방향이다. 분노는 추진력이지만, 분노만으로는 도착할 수 없다. 상처를 인식하고, 그 상처 위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복수는 치유의 초입으로 변한다. 즉, 오수재는 타인의 상처를 자신의 것으로 옮겨 적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타자와 연결하는 방식으로 길을 낸다. 그래서 그의 싸움은 점점 ‘나의 회복’이라는 지점에 닿는다.
복수의 끝에서 오수재가 얻는 것은 명예 회복만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가혹했던 판단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기댈 수 있는 용기를 배운다. 상처의 기원은 타자에게 있었지만, 상처의 귀환은 나에게 있다—이 역설이 치유의 핵심이다.
3) 사랑이 가진 구원의 힘과 인간다움의 회복
공찬과의 관계는 작품의 온도 조절 장치이자 윤리적 좌표다. 공찬은 오수재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이 말은 달콤한 위로가 아니라 실천적 제안이다. 완벽함을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타인에게 기대는 기술을 배운다. 사랑은 그 기술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 사랑은 특정 장르적 관습(남녀의 설레는 장면)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타인의 무너짐을 함께 감당하려는 태도로 확장된다. 그래서 두 사람의 서사는 고백보다 ‘경청’과 ‘동행’의 어휘로 채워진다. 오수재가 처음으로 약함을 인정하는 장면들은 바로 이 사랑의 결과물이다. 결론적으로 사랑은 구원이며, 구원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로의 귀환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힘—그게 작품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이다.
- 사랑은 상처의 부재가 아니라 상처와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 구원은 극적 사건이 아니라 작은 선택의 반복에서 태어난다.
- 인간다움은 타인의 시간에 속도를 맞추는 데서 회복된다.
한 줄 요약 & 밑줄 긋기
한 줄 요약: <왜 오수재인가>는 힘의 문법으로 기울어진 법정을 통과해, 상처를 의미로 바꾸고, 사랑으로 현실을 다시 견디는 법을 가르친다.
밑줄 1 — 정의의 균형
진실은 저절로 승리하지 않는다. 누가 말하고, 누가 듣고, 무엇을 기록하는가가 정의의 무게를 바꾼다.
밑줄 2 — 상처의 전환
상처를 미화하지 말 것. 다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것. 의미는 사람을 무너지지 않게 한다.
밑줄 3 — 사랑의 기술
사랑은 ‘완벽’이 아닌 ‘동행’의 기술이다. 함께 버틴 시간이 곧 관계의 정의다.
마무리 — 질문이 남는 드라마
좋은 드라마는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남긴다. <왜 오수재인가>는 정교한 서사와 캐릭터의 결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느 순간 진실보다 편의를 택하지 않았는가? 내 상처는 파괴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치유의 언어를 배우고 있는가? 누군가의 무게를 함께 들어줄 사랑의 기술을 나는 갖고 있는가?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장면을 떠올리며, 오늘의 삶을 조금 다르게 선택한다.
법은 약자를 지키는 성벽이어야 하지만, 현실의 법정은 힘 있는 자의 방패가 되기도 한다. 작품은 로펌, 재계, 언론이 얽힌 이익의 그물망 속에서 정의가 얼마나 손쉽게 탈색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